34. 불가능 하다고 하더라도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매다
사람은 보통 자신이 하는 일이 100퍼센트 성공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잘 될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 활등을 한다. 야구는 패전 처리 추수라는 역할이 있다. 이미 승부는 기울 어저 지는 쪽이 승부를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직 공수를 주고 받는 이닝은 끝이 나지 않았을 때 팀의 에이스나 구원전문 투수를 마운드에 올려서 괜히 체력을 소모 시킬 필요가 없다. 승부는 결정 났지만 야구가 계속될 때 패전 처리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간다. 그 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자신이 태어날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다들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고, 가진 것이 삶의 멍에가 되지 않고 실력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지만 내'가 바란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신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기적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는 현실에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없었다. 기회의 문이 자꾸 닫히는 것을 보면서 공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공자는 자신을 한편으론 변명하는 듯 다른 한편으론 위로하는 듯 '불가이위'라는 말을 던진다. 참으로 결연하다. 패전 처리 투 수의 심정과 조금은 닮았으리라.자로가 노나라 석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자로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길을 나섰다가 문지기를 만났다. 문지기가 물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배우는 사람인 듯한데 어디에서 왔습니까?" 자로가 대꾸했다. "공씨 문하에서 왔습니다." 문지기가 공 선 생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마디 했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는 사람 말이지요?" 자로는 공자의 제자다. 숙은 묵다, 머무르다는 뜻이다. 신은 새벽, 아침의 뜻이다. 문은 문지기를 가리킨다. 해는 어찌, 어느, 어디의 뜻이다. 자리는 ~로부터의 뜻으로 출신을 나타낸다.
지는 알다는 뜻으로 상황 파악을 한다는 맥락이다. 불가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맥락이다. 위는 기본적으로 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사회를 개혁해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는 맥락이다. 신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모세의 기적처럼 방금 까지 멀쩡하던 강을 쪼개서 강을 건너게 할 수 있다. 공자는 자기 스스로 성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난세의 영웅처럼 정치적 자립을 이루어 세상의 새 판을 짜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좁고 얕았지만 그가 가야 하는 길은 참 으로 넓고 깊었다.
성문의 문지기처럼 공자가 가려는 길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반면 공자가 가려는 길이 멀고 협하므로 그만두라고 권하는 사 람도 많았다. 당시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사람들은 많이들 세상을 등지고 은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홍수와 쓰나미 처럼 도도하게 밀려오더니 세상이 온통 악의 흑탕물을 뒤집어썼는데 누가 무슨 수로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
성인에겐 괜찮은 사람을 찾느라 사람을 가리는 길이랑 세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서 세상을 피하는 길밖에 없다. 은자가 후자라면 공자는 전자다. 공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일행과 헤어져 잠깐 비를 피해 남의 처마 밑에 있다가 상갓집 개와 같다는 말을 들 은 적도 있다.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무너지지않고 도대체 무슨 힘으로 스스로를 버틴 것일까? 공자는 말한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궁색하더라도 "사람이 날짐승이나 들짐승과 함께 무리를 이룰 수 없고 사람의 무리와 더불어 지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이는 결코 세상을 한탄하고 저주하며 적의를 잔뜩 품은 버림받은 자의 체념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는 약하지만 강한 운명애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선생을 두고 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하고 뿔뿔이 떠나갈 수 있을까?
35. 영원한 스승이 없어서 배우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여러 교 과와 전공이 있는 만큼 다양한 선생님이 있다. 하지만 감명 깊은 선생님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고만고만한 기억이 아니라 때때로 나 의 인생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강렬한 선생님은 참으로 드물다. 누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을까? 공산품의 경우 포장지 겉면에 내용 성분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쓰여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성분도 그렇게 적는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부모님도 있고 가족과 친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친구도 있고 TV가 있고 책도 있고 여행과 체험 활동도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일까? 아마 사람마다 각각 른 대답 이 나올 수 있으리라.
공자는 당시 최고의 스승으로 평가받았다. 그만큼 그는 누구로부 터 배웠을까 라는 호기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자공은 어떤 분야에서 공자가 누구에게 배웠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는 공자에게 스승이 없다고 대답했다. 왜 그럴까?
위나라 공손 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당신의 스승 중니는 누구에게 배웠나요?” 자공이 대꾸했다. "주나라 문임금과 무임금이 걸어가신 길이 아직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았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현인이라면 그 문화의 핵심을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문화의 자잘한 조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문임금과 무임금이 걸어가신 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어디서인들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떻게 영원한 스승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중니는 공자의 자다. 공자는 존칭이고 성명은 공구다. 문무는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건국 영웅 이다. 아울러 두 사람은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두 가지 원천, 즉 문과 무의 가치를 완전히 구현한 인물이었다. 문은 평화, 문화를 가리키고 무는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를 억지하는 힘을 가리킨다.
추는 떨어지다, 잃다는 뜻으로 가치가 완전히 상실되어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 것이다. '추어지'는 오늘날에도 " 00이 땅에 떨어 지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현은 어질다, 덕행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식은 기억하다, 알다는 뜻이다. 부자는 존칭으로 공자를 가리킨다. 상황은 일정하다, 늘, 불변하다는 뜻이다. '하이~ 유성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뜻으로 실제로는 부정을 나타낸다.
학무상사라는 말은 위 구절에 나오지 않지만 하유를 부정으로 보면 조합해낼 수 있다. 이 말은 훗날 위대한 인물의 정 신적 기원을 '학무상사'로 말하는 것의 기원인 셈이다. 우리나라 불 교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원효와 보조 지눌의 지적 세계를 흔히
"학무상사, 유도지종 이라고 일컫는다.
깊이 따져보지 않으면 '학무상사'를 오해할 수도 있다. 이 말은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 이 아니다. 오히려 스승이 아주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자가 일군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단 한 명의 어떤 특정한 스승에게 연결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학무상사의 의미을 제대로 알려면 이사회의 이야기를 들어본 필요가 있다. 초나라 출신의 이사가 진나라의 미래를 예상하고서 진으로 와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스파이사전이 발생해서 외국 출신 공직자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한나라 출신의 정국이해 이 진나라 재정을 파탄 낼 생각으로 진으로 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가 그 전모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사는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갑작스럽게 위기를 만난 셈이었다. 그는 추방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진왕 정비(훗날 통일 뒤의 진시황)에게 오늘날에도 명문으로 알려진 간축객서 즉 외국인 공직자를 추방하라는 명령에 반대한다는 글을 썼다.
그 안에서 그는 "높다는 태산은 흙덩이며 돌덩이를 가리지 않아 웅 이루게 되었고 큰 강과 바다는 졸졸 흐르는 물을 마다하지 않아 심연을 이룰 수 있었다" 고 주장했다. 이와 견줘본다면 학무상사는 공자는 모 든 지식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함을 일굴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흘러드는 물을 막는 둑을 얼마나 많이 또는 높이 세우고 있는가?
36 마음 가는 길 따라도 부딪치는 것이 없다.
학생은 늘 언제 외우고 익히는 답답합으로부터 벗어날까 하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배율 때 정작 외국어는 하지 않고 단어만 축도록 외우는 시절이 있다. 얼마나 갑갑한가?
스포츠는 재미를 느끼면 빠지지만 모르면 참 이상한 세계다. 품 피는 공이 매우 작으며 축구는 사람의 손을 묶고 농구는 사람의 손을 자유롭게 하듯 스포츠는 제각각 사람에게 제약을 가한다. 선수 들은 그 제약 아래에서 오랫동안 연습하다보면 마지 제약을 느끼지 못하는 듯 능수능란하게 플레이를 한다. 마이클 조던이 농구하는 것을 보면 코트를 훨훨날아다니는 듯 보이고 펠레나 마라도나나 메시가 공을 모는 장면을 보면 수비수가 있으나마나 축구장을 마구 휘젓는 듯이 보인다. 경기 규칙이 그들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거 꾸로 그들이 규칙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알아야 하는 상식이 있다. 우리는 조던이나 메시처럼 규칙과 상식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공자는 70세 즈음에 이르러 '종심불유'라는 자유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공 선생이 돌이켜 생각하면서 일러주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배우려는 동기를 가졌고, 서른 살에 제자리를 찾았으며, 마흔 살에 가지 못하는 길과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헷갈리지 않았 고, 쉰 살에 하늘의 명령을 깨달았으며, 예순 살에 어떤 소리에서 도 합리적인 요소를 찾았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가더라도 기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유는 또, 있다. 가지다는 뜻이다. 영어로 and와 plus 에 어울린다. 10+5 열다섯 살이다. 립은 서다, 세우다는 뜻이다. 서다는 물리적으로 발을 땅에 대고 다리와 허리를 쭉 펴서 곧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다는 다른 사람에 기대 지 않고 혼자서 제 역할을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같은 글자를 어 떤 맥락으로 읽어야 할지 아는 것이 쉽지 않다.
혹은 의심하다, 헷갈리다, 의혹의 뜻이다. 지씨는 감각으로 지 각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천명은 유일신이 신자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험과 오랜 사색을 통해서 역사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고 행위자가 그에 맞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맥락이다.
이는 귀의 뜻이고 순는 부드럽다. 순하다는 뜻이다. 젊었을 적에는 누군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할라치면 울적하며 감정이 상한다. 그런데 이순은 나이도 나이지만 오랜 경험으로 인해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때마다 심정이 상하지 않고 편하게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험은 모든 것을 지켜보게 만드는 여유를 준다.
예컨대 아이가 버롯없는 행동을 하면 젊은 부모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지적해서 시정하게 하지만 나이 지긋한 부모는 뭘 그러느냐며 내버려두면 스스로 알아서 고치게 된다고 한다. 실수했거나 그냥 한 말인데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오히려 아이를 삐딱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내버러두면 아이가 올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은 따르다, 좋다는 뜻이다. 유는 넘다. 타넘다, 지나가다,어기다는 뜻이다. 구는 원래 네모난 각을 만드는 공작 도구를 말 하는데 여기서는 표준, 기준, 사회 규범을 가리킨다.
공자의 자유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러 저절로 주어진 것일 수도 있다. 세월이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니면 오랜 시 간에 걸쳐 꾸준히 노력한 끝에 비로소 얻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처 음에는 외워서 하니까 뭔가 어색하지만 세월을 통해 어색함을 털어 내고 자유의 날개를 단 것일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이 구절 은 칠순 나이에 이르러 더 이상 자신을 얽어매던 규범의 사슬로부터 놓여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은 공자에 게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 우리는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농구공이 조던의 손에 붙어 있다거나 축구공이 메시의 발에 붙어 있다는 말로 그들의 기량을 높이 산다. 마찬가지로 규범이 공자의 몸에 붙어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완전하게 밀착한 것이다.
그 사이는 바늘조차도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견고한 것이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는 신참이 고참의 행동을 보고 꿈꾼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어야지!" 공자도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꿈꾸었고
'나이 들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우리도 금방 적었다 지우는 꿈이 아니라 인생을 통해 길게 가는 꿈 하나를 그리자. 그리고 꿈이 이 부어지는 그날에 미소를 지어보자. 하상들은 공자의 그 미소를 보았기에 자신들도 나름대로 꿈 하나씩을 간직했으리라.
37. 앞을 보여주고 뒤를 찾아라
선생과 학생은 가르침을 주고받는 사이다. 이 사이 가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 선생은 열의를 다해 가르치더라도 학생 이 알아듣지 못해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학생이 알고자 하는 것을 선생이 적절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 강의 준비를 잔뜩 해서 한두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고 했을 때 수 업이 끝나면 늘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이것저것 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학생으로서는 처음 듣는 것 이거나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소화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음식의 경우 정해진 조리법에 따라 식재료를 불판에 놓고 정성을 다해 얼마간 가열하면 언제나 비슷한 맛을 가진 요리를 조리할 수 있다. 겨울의 붕어빵도 그렇게 해서 굽는다. 하지만 가르침은 음식 만드는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이를 알고부터 학생들이 이해할 만한 배경 지식을 면 저 설명하고 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씩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공자는 초짜 선생처럼 한꺼번에 왕창 알려주려는 '조급증을 가지 지 않은 모양이다. '고왕지래'를 보니 느긋함이 묻어난다.
자공이 물었다. "고대 시가집을 보면 뼈, 뿔, 상아, 옥돌 등을 자르는 듯 거칠게 가는 듯, 또 이어서 조는 뜻을 게 다듬는 듯이라고 읊고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맥락이지요?
"공 선생이 칭찬했다. "자공아, 비로소 이제 내가 너와 디불어 사용 논의할 수 있겠구나. 앞가락을 일러주니 뒷가락을 풀어내는구나"
이 구절은 01.15/015의 후반부다. 전반부는 1강의 27장 '부이무교를 참조하라.
시는 운문 형식으로 창작되는 문학 장르다. 여기서 시는 고대 시가를 모아놓은 서적으로 오늘날 「시경으로 알려져 있다. 인용된 시는 위나라 민요 중 「기수의 물굽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절차탁마는 오늘날 학업과 인격을 닦는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 뼈, 뿔, 상아, 옥처럼 다른 재료를 각각자르고 거칠게 갈고 쪼고 곱게 다듬는 작업 방식을 가리킨다.
사는 자공의 이름이다. 시는 처음으로, 비로소, 시작하다는 뜻이다. 여는 함께, 더불어, 주다는 뜻이다. 고는 알리다. 깨우쳐주다, 가르치다는 뜻이다. 지는 알다, 지각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추론한다는 맥락이다. 왕래는 이미 말한 것과 앞으로 말할 것을 가리킨다. 쉬운예를 들자면 우리가 아이에게 한 자리 숫자 덧셈을 가르쳤는데 인 제 혼자서 두 자리 나아가 세 자리 덧셈을 할 줄 아는 경우가 있다.
이 때 한 자리 숫자 생은 양이 되고 두 자리 또는 세 자리 덧셈은 ‘래’가 되는 것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천전히 다가간다고 생각하지만 학생은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 학생은 선생에게 빨리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선생은 너무 늦다고 느낀다. 이때 선생은 답답한 만큼 학 생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더 많이 주려고 하면서 다그친다. 학생은 아찔한 만큼 선생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자꾸 도망가려고 한 다. 이로써 둘 사이가 더 가깝게 되기보다 멀어진다.
01.15/015를 보면 공자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학생의 말이 나 오기를 앞질러서 먼저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먼저 자공이 운을 떼고 공자가 짧게 대답한다. 그리고 침묵한다. 만약 공자가 자공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다 말했더라면 자공은 그 사이에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공은 자신의 말과 공자의 말 사이에 있는 차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묻는다. 이로써 그는 이전에 배웠던 것과 지금 들은 것을 하나로 이어 붙여서 차이를 설명해낸 다. 공자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공이 순식간에 큰 만큼 그 성장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제 자신이 자공과 함께 동일한 사상의 지평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이보다 더한 칭 찬이 어디 있겠는가?
들여다보면 공자는 제자가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을 찾도록 찬잔히 이끌어간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제자가 몰라서 답답해하고 아질해하면서도 결국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알면서 내버려두는 '기다림이 숨어 있다. 기다림 뒤에 자공은 공자가 말할 법한 말을 던지고 있다. 고왕지래는 선생과 함께 부르는 발견의 합창 소리다. 이는 부처와 가섭의 염화미소에 비할 수 있다. 반면 지금도 우리 주위에선 학생, 후배, 팀원이 뭐라고 말할라치면 선생, 선배, 팀장 등이 그건됐고! 라며 말허리를 자르고 나가지 않는가?